요가난다의 차고 지붕을 수리하고 몇 가지 청소 작업을 마친 나는 사막의 은거지를 떠나왔다. 나는 트웬티나인 팜스 고속도로를 타고 와싱턴 산을 향해 돌아갔다. 와싱턴 산정의 수도원 문 안으로 들어온 나는 차를 주차시킨 뒤 내 방을 향해 걸어갔다.

  테니스 코트에 이르자 나는 멈춰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석양이 지면서 등불들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그렇다. 로스앤젤레스는 야경이 훨씬 더 나아 보인다. 나는 잔디밭에 앉아 명상을 했다.

  와싱턴 산을 떠나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신이 생겼다. 내가 체험한 환영들은 사실이었다. 지금 문제는 언제 어떻게 떠나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기로 마음 먹었다. 내게는 인디아 하우스에서 해야 할 작업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보도도 깔아야 했고 계단도 설치해야 했다. 호수 사원에서의 작업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1951년 여름 내내 나는 바쁘게 지냈다.

  마스터 요가난다는 여름 기간 대부분을 사막 은거지에서 머물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가장 중요한 작업, 바가바드 기타 번역을 마쳐야만 해." 그리고 내게 작별 인사를 했다. 나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관심은 이제 끝났다.

  나는 아주 이따금씩 요가난다가 와싱턴 산으로 오갈 때만 그를 볼 수 있었다. 나의 길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요가난다의 삶과 영적인 미션을 경험했다. 이제 나의 길이 저 멀리 지평 위로 뻗어있었다. 나의 길은 명상 속에서 미리 보았던 대로 가파른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내 앞에 믿을 수 없는 환경의 환영들이 솟아올랐다.

  나는 이 지구 위에서의 삶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철저히 경험하고 목격하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었을 때, 아니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나는 타인들을 도와줄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만일 누군가를 치유하고 도와주려면 우리는 반드시 질병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는 금욕적인 수사의 생활방식이 아니라 인간들과 함께 일하고 땀을 흘려야만 한다. 나는 알았다, 내가 인간의 일상적인 문제들과 더불어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천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나는 지옥과 그것을 창조한 부정적인 타락 영들의 실재를 체험하게 될 것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생이 시작된 바로 그 순간부터 지상에 존재하는 어둠의 영들에 대한 경고를 받아왔다. 사탄, 루시퍼, 바알세불, 그리고 그 밖의 파괴적인 악마들로 알려진 살아있는 엔터티들의 존재는 내게 있어 살아있는 실재가 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나의 존재와 나의 미션의 완성을 위한 투쟁 속에서 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한 나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옥이라 불리는 아스트럴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들을 두 눈 똑 바로 뜨고 지켜보게 될 것이다.

  나는 과학적인 성과를 통해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고 있는 현대인이 우주에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한 선조들의 오랜 믿음을 간과하고 있는 걸 보아왔다. 그 초자연적인 존재들은 인간들과 다른 진동 차원 상에 있다. 인간의 물리적인 감각들은 특정한 진동 인식에 국한돼 있다. 따라서 오감에 포착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차원의 존재들을 배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시공에 존재하는 그들의 진정한 상태를 볼 수 있으려면 예수가 말했던 '하나의 눈', 즉 진정한 영적인 비젼vision을 가져야만 한다. 비젼vision과 불사의 체험을 얻은 사람은 선과 악의 힘들 사이에 벌어진 시공 속에서의 믿기지 않는 치열한 전쟁을 본다. 신의 아들들, 빌더(건설자)들과 어둠의 영들, 타락 천사 사이에 시작된 고대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소위 루시퍼의 타락이라는 것은 사실일까, 허구일까? 인간들은 자신들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일상적인 자유 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인간들은 미지의 힘들의 조종에 따라 춤을 춘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유의지를 가지지 않다는 걸 알게 되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나의 왕국도 그러하니라." 이 말 속에서 예수는 다른 왕국 다른 존재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상태 하에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탐구하지 않는 한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욕망 또는 과거의 행위들에 의해 빛과 어둠의 힘들을 끌어당긴다. 특정한 미션을 위해 화신한 혼들은 그 탄생의 순간부터 반대편 힘들에 둘러싸인다. 아데프트가 지상에 돌아오는 길 위에는 장애물들이 놓인다. 나는 어둠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걸 아주 빨리 배웠다. 나는 매 순간마다 깨어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신은 누군가를 만나자 마자 전생에 알고 있던 사람이라고 느껴본 적이 있는가?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와 그의 몇몇 제자들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만났었다. 어쩌면 함께 일을 했을 수도,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았을 수도, 또는 신성한 존재 속에서 하나의 위치를 공유했을 수도 있다. 어떤 놀라운 마법적 힘이, 또는 지난 시대의 어떤 연계적 사건들이 우리를 다시 현 시대에 함께 끌어 모았을까? 앞으로 죽음과 환생의 지평선 너머로부터 어떤 새로운 친구들이 나타나게 될까?


  1951년 2월 3일. 노먼 폴슨의 생일날 요가난다가 보낸 축하 메시지.

  "친애하는 노먼에게. 너의 탄생이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기를. 너의 생일이 신 의식으로 충만하기를. 생일 축하한다. 끝없는 축복을 주며.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깊은 명상 속에서 나는 신성한 태양 로고스를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여행자들이 돌아가는 미지의 영역이자 만물의 위대한 센터, 만물이 회전하는 궤도의 축이다. 고대인들은 이 장소를 대 중앙 태양의 센터라고 불렀다. 이것은 신성한 영 아버지-어머니가 창조의 최초 빛인 그리스도의 관념을 심고, 점화시키고, 탄생시킨 초점이다. 영의 생명력은 가시적으로 만들어졌다.

  까마득한 과거에 창조의 위대한 천체는 대 중앙 태양의 센터로부터 모든 방향을 향해 외부로 여행하기 시작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확장해 가고 있다.

  우리 내면의 그리스도 옥좌에 대해 명상하면서 끈기 있게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포효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우주적 자류가 만나는 곳에서 강력한 파괴자들이 보좌 위에 앉아 고동치고 있다. 모든 이미지들의 투사자, 그리스도의 빛은 이제 앞에 뚜렷이 드러나 영원의 고요한 빛 속에서 우리에게 현시된다.

  우리 인간들은, 헌신과 소망 그리고 입증된 명상 행법을 통해 이 생에서 그리스도 의식을 성취할 수 있다. 우리는 꾸준한 명상과 이타적인 봉사를 통해 시간을 멈춰 서게 할 수 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확장해 가는 창조의 구들의 중심 속에 떠 있는 그리스도의 몸, 대 중앙 태양을 볼 수 있다.

  그때 그리스도의 빛나는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는 힘인 우리의 혼속에 내재된 순수 자아는 우리의 의식적 자각 앞에 그 현존을 드러낸다. 천사들은 백색의 불로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인간 속으로 내려오려고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하나의 살아있는 의식적 존재가 편재하는 창조의 구들 속에, 영원 저 너머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사랑과 인식에 대한 소망이 투철하다면 우리는 신과 직접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낙엽들이 와싱턴 산의 길과 도로를 덮고 있었다. 이곳의 모든 젊은 형제들과 나이든 몇몇 형제들 앞에 브라마차리야의 최종 수계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브라마차리야가 된다는 것은 이 생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교단의 수사로서 독신 생활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는 그 수계식에 모든 사람들이 참석하기를 원했다. 누가 최종 계를 받게 될 지는 사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자리에 서자 나는 앞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본 환영들을 다시 반추해 보았다. 아니야, 나는 결혼하게 될 거야. 그리고 아마 아이들도 가지게 될 거고. 나는 서약을 할 수 없었다. 요가난다가 거기에 서 있었다. 모든 형제들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네가 머물렀으면 좋겠어. 하지만 네가 떠날 거라는 걸 알아."

  그 순간에 나는,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이제 내가 곤란에 처하거나 사역을 그만두고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그날 이후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 계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느낄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깊은 고독감이 느껴졌다.

  어느 일요일 날 나는 헐리우드 교회로 갔다. 버나드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복도에 앉아있었다. 명상을 하려 했지만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 순간 누가 내 곁에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말소리가 들려왔다. "노먼, 노먼, 니 애비다. 내 말 들리니? 집으로 와라. 만나자."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가 정말로 거기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을 뜨고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의식을 내게 투사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만큼 가까웠다. 그가 나의 불행을 인식했던 것이다.

  설교가 끝나자 버나드와 대화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나는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에게 나의 기분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의 유일한 충고는 이것이었다. "오, 이런! 세상에 나가서 혼자 무얼 할 수 있겠어? 너는 아직 풋내기라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내 자신과 나의 길에 대해 정말로 의심이 갔다. 그것은 모두 사실일까? 그래 나는 풋내기일지 몰라. 나는 앉아서 그 문제에 대해 명상했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가 1920년 9월 이 나라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과학적인 명상 행법들과 고대 요가의 수행법을 통한 자아실현의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 그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단계적으로 입증해 보여주었다. 그는 서구 세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가르친 최초의 동양 요가 스승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실재 속으로 들어가는 보다 위대한 비젼vision을 가지고 도그마적인 기독교 신앙의 얼음을 깨부수고 있었다. 그는 결코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깊은 명상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노력했다. 매해 열리는 크리스마스 명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기억하도록 하는데 바쳐졌다.

  우리는 이제 예수가 대중들 말고 제자들에게 은밀히 전한 가르침들에 대해 사색할 수 있다. 예수가 명상법을 직제자들에게 전했다는 것은 과연 사실일까? 그렇다. 신약은 초기 교부들에 의해 많은 부분이 버려졌다! 우리는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외경들과 여타의 기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집트 개종자들에 의해 씌어진 영지주의 복음서들과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설형 문자판들에 대한 해설서 등. 이 타블렛들은 성경에 씌어진 것과 비교해 창조에 대한 심오하고 혁명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유프라테스 계곡에서는 인류의 창조와 지구의 역사를 묘사하고 있는 수천의 타블렛들이 발견되었다. 성경의 일부는 그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씌어졌다. 만일 에세네파에 의해 씌어진 쿰란의 두루마리들을 연구한다면 우리는 '의로운 교사들'로 언급되는 존재들의 영감에 넘치는 가르침들을 통해 신성한 깨달음을 향한 점진적인 진보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에세네 공동체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도그마적인 태도에 의해 말살되었다.

  에세네파에 의해 운영된 성공적인 영적 공동체에 질투심을 느낀 그들은 그 교사인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가 체제를 전복하려 하고 있다고 당국을 꾀어 당시의 잔인한 처형법인 십자가형을 받게 하였다.

  하지만 무려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상황은 진정으로 변하였을까? 과거의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오늘날 다른 가면을 쓰고 돌아왔다. 그들은 예전에 했던 것과 꼭 같이 무지하고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고 심판 행위를 하고 있다. 오늘날 그들의 위치는 예수 시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분명 그리스도는 그러한 행위들을 묵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성 교회를 포함하여 오늘날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까? 예수는 과거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박해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마음 속에 한 작은 인도인의 모습이 보인다. 어깨로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하고 스와미 교단의 전통 오렌지 색 법복을 입은 그가 보스톤 항구에 정박한 대양 정기선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때는 1920년. 그것은 그의 첫 미국 여행이었다. 1920년 10월 6일 그는 인도 스와미 교단의 대표로 보스톤에서 열린 세계 종교 회의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 후 그는 이곳 미국에서 크리야 요가로 알려진 고대 명상법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의식을 발현시켜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곳에 온 후 20여년 동안 박해로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긴 머리에 오렌지 법의를 걸친 스와미는 대중들에게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그가 발산하는 자력적인 독특한 인성은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가 전하는 역동적인 메시지는 많은 무리들을 매혹시켰다. 시간이 흐르고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가자 기성 종교계는 위협감을 느끼고 그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낯선 이방의 땅과 사람들 사이에서 확고히 홀로 서 있었다. 그의 불굴의 의지와 모든 것을 감싸는 사랑은 그를 사랑하건 미워하건 모든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역사가 입증해 주듯이 기성 세력은 새로운 것에 대해 대개 부정적이다. 두려움 때문이든 질투심 때문이든 천상의 메신저들은 시달림과 박해를 받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지쳐서 천명을 다하기 전에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낯선 땅의 외로운 전사였던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는 자신의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eyeinhand&categoryNo=10

Posted by 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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