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 라자요가 명상법
라자요가(RAJA YOGA)는 68년 전 인도에서 시작된 명상교육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인도인에게만 가르쳐 오다가 30여년 전부터 런던과 시드니를 중심으로 서방세계에 소개되어 현재 동남아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90개국) 특히, 라자요가의 가르침이 순수한 차원에서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일찍이 유엔(UN)의 인정을 받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와 공보처의 비정부 자문위원으로 발탁되어 유엔의 교육활동을 보조하고, 주요한 프로그램으로 활용되고 있다. 유엔으로부터 세계평화 메신저 상도 여러 차례 받은바 있다.
이 교육의 본부는 「브라마 쿠마리스 세계영성대학교(BRAHMA KUMARIS WORLD SPIRITUAL UNIVERSITY)」로서, 인도에는 뉴델리, 유럽에는 런던, 아시아에는 시드니에 각각 본부를 두고 있다. 한국에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뒤늦게 소개되었다.
라자요가의 명상법을 살펴보기에 앞서, 현대인에게 왜 명상이 필요한 지를 생각해 보자. 20세기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문명의 시대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지각(지각)이나 감성(감성), 마음, 행동 등이 마치 외부의 작용에 대해 자동 반응하는 감각적인 기계처럼 되어 가고 있음으로써 비인간화 현상을 가속시키고 있다. 그런 비인간화된 삶을 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좌절․실패․허무․불안감 등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라자요가는,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인이 그 자신의 진실된 내적 자아를 망각 혹은 상실하고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해 사람은 한번쯤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성찰,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 권장하고 있다. 명상은 바로 이러한 인간존재 현상의 부정적 측면을 바로 잡아주고, 인간의 행동양식을 지배하는 내적 자아를 발견․성찰하게 해준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굳어져 온, 기계화된 사고와 행동을 다시 재조정․재훈련 시켜 준다는 점에서 현대인 모두에게 더욱 긍정적이고 안정감 있는 생활을 위해서 필수적인 수행방법이다. 마치 육체가 피로하면 휴식을 취해야 하듯, 정신도 피로하면 정기적인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다.
라자요가의 강좌는 4개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강좌는 영혼 의식(Soul Consciousness)의 자각에 대하여,
제 2강좌는 지고 의식(Supreme Consciousness)에 대하여,
제 3강좌는 행동의 법칙, 즉 업(업;Karma)에 대한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 4강좌는 시간의 원리
제 5강좌는 지금까지의 강의를 요약하며, 실제 수행에 필요한 행법을 첨부한다.
1. 제 1강좌 : 영혼 의식
라자(Raja)란 인도어로 왕, 주인, 지배자란 뜻이며, 요가(Yoga)는 합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라자요가란 깊은 명상 기도의 차원을 통해, 자아를 제어할 수 있는 본래의 위엄 있는 상태에 이른다는 뜻이다.
라자요가에서 말하는 ‘진정한 자아’란 어떤 것일까? 즉, 나란 누구인가? 이렇게 자문해 볼 때, 우리는 의례 이름이 무엇이며, 직업, 나이, 성별, 인종 등 외형적인 형태나 조건들을 들어 대답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것으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편리한 외적 요소일 따름이다. 라자요가에서는 이런 육체적인 나와는 별개로, 느끼고 생각하며 의식하는 어떤 생명체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 살아 있는 자아의 존재라 할 수 있으며, 육체는 다만 그 의식작용을 행동화할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내적 자아는 어떤 모습인가? 한마디로, 극소의 미묘한 에너지의 형태인 빛의 일 점(Point of Light)과 같다. 중량이 있을 수 없는 지극히 가벼운 미묘한 에너지의 스파크와 같은 형태이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떤 본질을 지니는가? 「옴 샨티」란 인도어로서, 「옴」은 “나는 영혼이다”라는 뜻이고 ‘샨티’는 평화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옴 샨티는 “나는 평화스러운 한 영혼”이란 뜻으로, 곧 의식의 생명체인 영혼의 본질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 욕구나 구도의 목적이 하나의 평화감, 행복감에 이르는 것이므로, 「옴 샨티」로 상징되는 영혼의 속성은 영혼의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욕구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영혼의 속성은 불멸하다는 점이다. 사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상생활에서 필요한 육체가 물질계의 특성인 낙후의 법칙(law of entropy)에 의해서 생성․유지․소멸의 반복과정을 겪으면서 경험하는 변화의 개념일 뿐이다. 때문에, 물질계, 즉 시공의 한계를 초월하는 영혼의 세계에서는 생사의 구분이 없는 영혼불멸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구라는 자연생물권 안에서 필요한 생리적인 남녀의 구분이 영혼과 무관하므로, 자연적으로 영혼의 상태에서는 모두가 순수한, 그리고 평등한 형제와 같다.
그러면, 영혼은 어디에 자리하는가? 이마의 중앙부위에, 소위 영안 혹은 제 3안이라고 불리는 부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깊은 명상차원에 들어갔을 때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실제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머리의 정중앙 부위인 뇌중추신경의 바로 옆자리가 영혼의 위치이다. 그 이유는 지각에 의해 결정되는 의지가 전기적 자극에 의해 뇌의 파장으로 전달되며, 뇌는 중추신경계를 통해 이를 신체의 각 부분에 전달하여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외부의 어떤 작용이나 감각은 오관의 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되고, 뇌에서 다시 전기적 작용, 진동, 또는 파장에 의해서 의식에 전달, 그에 따른 감각적 인상, 심적 또는 지각적 기록, 기억작용 등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게 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라고 할 때의 생각이란, 위에서 설명한 바대로 전기적 자극에 의해서 파장을 내고, 그것이 기(기)라는 미묘한 에너지 형태로 대기 중에 쏘아져 실제 느껴지게 되는 작용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파장을 지니는 것은 각 사람의 감정상태의 다름도 있겠지만, 더욱 근본적인 까닭은 각자의 무의식 작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영혼(의식=생명) 속에는 세 가지 작용이 있는데, 첫째, 과거의 모든 행동에서 받은 인상, 산스카라(기질)가 기록되어 있는 잠재의식(혹은 무의식)이 있다. 업적, 행적의 기록 또는 업이라고 일컬어지는 잠재의식에는 과거의 모든 습관이나 인격, 기질, 취향, 감정 등이 수록되어 있다. 둘째, 마음이란 작용이 있는데, 이는 업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심 작용을 일으키며, 그 기억에 따라 감정을 갖고 사고하며, 느끼고 상상하는 작용을 한다. 셋째 지각작용을 들 수 있다. 이것 또한 무의식적인 업에 근거하여 그 범위 안에서 기억해 내고 그에 따라 이해, 판단, 결정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이 세 작용은 끊임없이 긴밀한 연관작용을 하며, 이런 작용을 하는 영혼으로서의 의식의 본체가 일상생활에서 생명력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라자요가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순수 영혼임을 자각하는 명상연습에 의해서 영혼을 나르는 수레와 같은 육체를 완전 제어하는 능력을 기르고, 그에 따라 산스카라가 정결해져서 완전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의 생활을 돌이켜 볼 때, 우리 인간의 본질이 영혼이란 인식을 철저하게 못했기 때문에, 물질의식이나 육체의식(Body Consciousness)의 혼돈 속에서 극히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해 왔고, 그 결과 내적 모순과 충돌이 조장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라자요가에서의 명상법은 자아의식의 자각 내지 전환에서부터 시작하여, 영혼의식을 실제 체험하는 데 있다. 어떤 테크닉적인 것을 근간으로 하는 다른 명상법과 달리, 영혼의 자각을 심화 내지 각인시키는 것이 라자요가의 명상법이다.
24시간 동안 야생마처럼 달리는 심 작용을 자각하고, 자신이 육체가 아니라 강한 에너지의 일 점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모든 심 작용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이런 상태가 될 때, 욕망을 조절하고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는 사고만을 선택하여 순수한 업을 개발함으로써 평화에의 신념에 닿을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라자요가의 알파와 오메가라 할 정도로 중요한 수행법이 바로 영혼의식(Soul Consciousness)의 연습이다. 오랫동안 무의식적인 육체의식의 관습에 젖어온 우리로서 한 순간도 영혼의 실체감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때, 라자요가의 수행법이 왜 중요한가를 알 수 있겠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인간이 그의 의식(영혼)에 의한 에너지의 파동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순수한 미덕의 평화스런 영혼이라는 자각을 갖는 진동체로서의 존재와 그저 조야하고 막연한 물질의식의 상태에서 나오는 파장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차이가 나게 된다.
다음에는 동물의 상태에서 인간, 더 나아가 신인적 차원에까지 이르는 영혼의식(Soul Consciousness) 수행의 이점을 살펴보겠다.
첫째, 극소 일 점의 순수한 혼 하나로만 느낄 수 있는 경지는 우주적이고 물리적 환경, 타인이나 어떤 외부적 영향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현대인이 얼마나 심한 스트레스적 환경에 놓여 있는가를 생각할 때, 아주 중요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외적으로 초연한 자세는 내적으로도 자아를 제어할 수 있는 의식력이 증대하여 업의 정화, 습관의 변화, 기질의 개발, 고양된 인격, 평화스런 영혼에로의 회복이 가능하게 해준다.
셋째, 일 점으로 화하는 완전.간단.단순성에로의 의식과 생활의 비약, 완벽한 집중 이 가능하며 천체적인 무중력의 경쾌감을 느낄 수 있다. 요컨대, 영혼의 자각에서 오는 인류의 형제애, 점 하나로 축소되는 완전 겸허함, 밀도 짙은 순수함, 평화감 등을 자연적으로 실현시켜 주는 방법이 바로 라자요가의 영혼의식의 고양이다.
이제 실제 명상연습에 앞서 몇 가지 주의점을 간단히 지적하면 우선, 라자요가의 명상은 눈을 뜨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라자요가는 지식에 의존, 자아의 내면의식(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요체이므로, 어떤 특정 명상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생활의 24시간에 걸쳐 행해질 수 있는 매우 적극적이고 자연스러우며 또한 강력한 수행방법이다. 눈을 뜨고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명상의 발전이 결국 완벽한 집중력에 있는 것이라 할 때, 두 눈을 뜬 상태가 의식의 초점에도 더 강렬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눈을 감으면 점차 이완되는 과정에서 쉽게 잠에 떨어지는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라자요가에서 「드리시티」(Drishti)란 용어는 시선의 힘을 말하는데, 두 눈이 철저히 영혼의 창으로서 사람을 볼 때 피상적으로 그의 신체나 외적 환경조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그가 평화스런 영혼(실존재 자체)임을 의식하고 바라보게 됨을 뜻한다.
또한 사물을 대할 때에도 자신이 혼이란 자각으로 있을 때, 더욱더 순수하고 정화되고 고양된 바이브레이션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라자요가에서는 두 눈을 뜬 상태로 시선을 고정한 채, 의식 그 자체로 명상을 진행하고 있다. 자세는 눕거나 엎드리는 것이 아니면, 어떤 자세도 무관하지만 몸을 가장 편안한 상태로 하는 것이 좋다. 불가의 선 수행에서 코끝의 솜털조차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는 말처럼, 가능한 한 고요의 상태를 유지하면 비물질적인 영혼의 속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욱 쉽다.
아침, 저녁으로 20-30분간 정기적인 명상시간에는 결가부좌 자세가 가장 안정적이며 조명은 너무 밝지 않은 것이 좋다.
가급적 붉은 전등을 이용하는 것이 좋은데, 이는 붉은 색이 심신을 이완시키는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명상실을 따로 두거나 한 자리를 정해 놓고 하게 되면, 정화된 바이브레이션이 축적되어 쉽게 명상의 분위기에 몰입되는 효과가 있다.
강의나 지식은 필히 경험으로 체험, 확인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명상테이프를 가지고 있으면 명상 첫째 날 영혼에 대한 테이프를 10분간 듣고, 없으면 약 5분간 강의 내용을 음미하며 조용히 명상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 좋다.
아름다운 꽃이나 빛, 또는 좋아하는 그림을 놓고 반드시 눈을 뜨고 하는 연습을 한다. 그래야 생활 속에서도 명상 연습이 가능하게 된다.
<명상 연습>
당신의 생각을, 당신의 마음을 자아에게로 돌린다.
진정한 자아, 영혼으로서의 나는 빛의 한 점이다.
아주 작은 에너지의 한 점인 나는 내 이마의 가운데에 앉아 있다.
이것이 내 진정한 자아이다.
실제적인 나, 몸으로서의 내 육체는 하나의 의복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는 에너지이며, 이것을 이용해서 내 존재를 표현하고
또, 이것을 통해서 내 인격을 나타낸다.
지금 나는 진정한 개체를 인식하게 된다.
나는 감옥의 문을 열었다. 나는 지금 자유롭다.
마치 새처럼.... 나는 다시 날아 오를 수 있다.
나는 평화라는 진정한 본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는 그 평화를 경험한다. 나는 그 평화가 된다. 나는 평화 그 자체이다.
나는 빛으로서의 진정한 본성을 경험한다. 나는 그 빛이 된다. 나는 빛이다.
또 나는 사랑으로서의 내 진정한 본질을 경험한다. 나는 그 사랑이 된다.
나는 사랑이다.
그리고 이제 내 영혼 안에는 힘이 가득 차게 된다.
가벼움과 편안함이 내 본성이 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육체의 노예가 아니고 주인이 되었다.
나는 온 세상에 가벼움과 평화, 그리고 순수함을 보내고 있다.
2. 제 2강좌 : 지고 의식
앞 강좌에서 말했듯이, 인간이 지상에서 삶을 시작할 때 생물학적 특성인 부모를 근본으로 태어나서 마감할 때까지 가족제도의 틀에 짜여 진 인간드라마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을 작은 범위의 인간세계 드라마라고 한다면, 우주전체의 질서와 그것조차 초월하는 초우주적 대서사시를 연출하는 감독은 누구일까? 이 우주는 그냥 우연적이고 무질서한 하나의 헤프닝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인간의 혼이 육체를 떠나면, 과연 고아처럼 우주 밖의 공간을 헤매는 떠돌이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육신의 어버이가 있듯이 진짜 생명체인 의식, 영혼의 어버이가 되는 상대적인 어떤 지주, 그런 지고의 영혼은 없는 것일까?
여기서 종교적 용어로는 신, 또 다른 개념으로는 지고의 의식상태(Supreme Soul, Supreme Consciousness), 최고의 의식상태 내지 영혼의 개념을 생각하게 된다. 그럼 절대의식의 형태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의 자질, 경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인간 영혼이 각자 나름의 독특한 다른 경험과 심적 파장을 지니지만, 역시 형체는 동일한 한 점의 포인트이듯이 지고의 영혼도 한 치의 차이 없이 인간의 영혼과 동일한 형체를 지니고 있다. 즉, 무한의 존재 또한 형태면에서는 무한소의 작은 일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도 분명히 의식 에너지의 생명체이므로 인격체를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우리와 영적인 관계 성립 내지 그 체험이 가능한 것이다. 유일하게 그의 업이라면, 같은 영혼으로서 인간혼과 부모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역사과정에서 그를 유일한 존재, 지혜의 대양, 전지전능한 지혜, 무한의식의 존재로 기억하며, 그로부터 무한히 큰 사랑과 평화, 자비가 오는 것으로 기억해 왔다. 그의 자질과 무한함은 극히 작은 일 점에서 나오는 빛의 힘조차 대양처럼 거대한 것이어서, 그 안에서 사랑, 평화, 순수, 환희가 솟아 나오며 그 자질의 목록조차 무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특성들을 이해하고 집중할 때, 거의 어떤 연결상태가 이루어지며, 그런 경험은 마치 그의 모든 질량이 홍수처럼 내 영혼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체험을 하게 된다. 결국, 완전한 변화가 내 의식, 영혼 안에서 성취된다.
이런 지고 의식에 대한 예증은 여러 종교의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가령, 일 점 스파크의 빛이 깊은 명상기도 중에 체험되었을 때, 타원형(oval shape)의 촛불 형태와 같다고 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힌두교 사원에서는 타원형의 시바링감을 신의 상징으로 보며, 이슬람교에서는 타원형의 흑수정을 두고 신은 그 어떤 우주적, 물질적, 인간적 존재로도 표현될 수 없는, 이렇게 생긴 하나의 영적 의식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불교 종파도 타원형의 한 점에 의식을 두고 참선을 하며,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에서도 신을 빛(God is Light)으로 여기고 있다. 예컨대, 모세가 신을 친견했을 때, 덤불 속에 있는 불덩이와 같다라고 한 성서기록이 있는가 하면, 잉카문명에서의 태양신, 인도의 경우 선지자인 구루 나나크의 종교에서 신은 인간의 형태를 지니지 않는 어떤 영체라고 하는 점 등이 또한 그 좋은 보기들이다.
라자요가에서는 지고의 의식체를 「시바」라고 한다. 「시바」(Shiva)는 신이란 뜻을 지닌 인도말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시혜자(benefactor) 즉 은혜를 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는 우리가 신을 벌주는 자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상반된 개념이다. 성경의 여호와가 시혜자인 것과 같은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포인트(point)라는 뜻이 있는데, 이는 바로 혼의 형태를 정확히 말한 것이다. 셋째, 씨앗(seed)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은 씨앗에 나무의 전체가 담겨 있듯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담은 창조주로서의 진리와 정확히 부합되는 단어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인도인들은 신을 시바라고 부르는 한편, 신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친근한 존재여서 아버지의 애칭인 「바바」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시바 바바」라고 하면 지고의 의식인 나의 영혼의 아버지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인간혼과 지고영혼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인간혼과 지고영혼과는 구성작용(마음, 인상, 지각)도 같다. 다만 차이라면, 그 질량에 있어서 지고영혼은 모든 종교적 경전에서 표현하듯 사랑의 대양(Ocean of Love), 지식의 대양(Ocean of Knowledge)으로 상징되는 무한의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혼이 5원소인 물질권, 즉 지상으로 내려 와서 각각의 역할을 할 때 생사의 과정에 의한 영혼의 낙후를 피할 수 없는데 비해, 지고의식은 영원히 항상적인 영체로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간혼이 육체 안에 갇혀 각자의 필연적인 행동에 따른 카르마의 굴레에 제한된 반면 지고의식은 물질낙후의 법칙에서 벗어나 생사를 초월한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름은 각각 그 회생(회생)마다 개인의 특정한 행동의 기록에 따른 역할, 즉 육체적인 상표인데 반해, 지고의식은 영원하며 항구적인 질량을 지닌다. 이런 항상성을 지니지 못한 인간으로서는 필연적으로 신을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분명히 살아 있는 의미로서의 생명체인 지고영혼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일까? 즉, 영혼의 세계는? 라자요가에서는 태양과 달을 포함한 우주권을 5원소로 된 물질세계로 보고 그 가운데 지구는 인간의 생물학적 삶의 현장으로 본다. 이 우주층을 벗어나 바로 연결되는 부분이 아스트랄계(별세계)이며 이곳은 유체나 영체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이다. 이곳을 가리켜 흰빛으로 층을 이룬 미묘의 세계(subtle world)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세계를 넘어서 있는 곳이 순수한 영혼의 세계(Soul World)이다. 이곳은 한 점 빛의 완전 순수한 영혼들이 거하는 곳으로 태양의 빛과는 다른 영적인 서늘한 붉은 빛으로 휩싸여 있다. 영혼의 세계는 완전한 평화와 자유, 정적, 안정감이 넘치는 세계로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 (소리가 없는 정적의 세계), 즉 열반이 바로 이 곳을 가리킨다.
영혼의 세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의 물질적 개념으로는 닿을 수 없는, 다시 말해 영혼(의식)만을 통해 체험되는 세계이다. 지고영혼은 바로 이 영혼 세계의 가장 높은 중심에 거하며, 그 무한 미덕의 바이브레이션을 끊임없이 우주전체에 방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상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 인간혼의 부모가 있는 영혼의 세계를 향해 그와 연결, 관계를 형성하고 그의 완덕을 재충전, 회복하는 것이 우리 혼을 정화하는 첩경이다. 이를 Seed Stage, 즉 씨앗 고유의 합일에 이르는 명상이라고 본다. 이 상태가 라자요가 명상의 최후의 단계이다. 이처럼 지고 의식체는 한 곳에 상주하면서 라디오 파장처럼 그의 질량을 우주전체에 내보내므로(순수 에너지=의식의 자연적 현상), 나의 사고를 그 원천에 맞출 때 나는 그곳에서 나오는 바이브레이션을 받을 수 있으며, 아울러 그와의 관계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왜 지금까지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 불가능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우리의 지각이나 마음이 주위의 일상, 즉 물질적 세상의 조야한 파동에 쏠려 있어 지고의식체의 순수한 파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혼 의식의 지각 속에 깨어 있는 연습, 좀더 미묘한 차원의 바이브레이션에 우리의 의식의 초점을 둘 때 지고의식과의 관계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의 사고를 통해서 어버이인 지고의식과의 접촉을 형성하고 합일이 이루어지면 평화감, 힘, 사랑 등 신의 자질에 속하는 모든 질량이 체험된다. 그로 인해 과거 인간이 숱한 삶을 거치면서 육체의식으로 인해 쌓인 모든 부정적 악의 기질을 정화하고 인간 본래의 신성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럴 때 라자요가의 목적인 인간혼의 완성이 이뤄진다. 이런 완성단계에 이를 때 완전 무오(무악)하며 충만한 미덕과 심성, 기질의 영혼이 자연적으로 지고의 행동규칙에 따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식에 자각을 주며 절대혼으로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이 지식이 과연 인간 차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지고의 순수한 영혼에 속한 지식인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끔 라자요가가 지고의 인간완성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오래된 육체적인 관념 때문에, 새로운 자아관을 습관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과거의 업적에서 떠오르는 여러 잡념 등의 방해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지고의식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있다면 그것과의 관계형성은 더욱 쉬워지며, 또 그의 완벽한 자질을 나의 무의식 안에 재창조할 수 있다.
사실, 라자요가는 간단하지만 그 안에 여러 종류의 요가를 담고 있다. 지식과 이해의 밸런스요가, 사랑으로 가는 헌신과 숭배요가, 또한 하타요가의 단련이 라자요가에서는 심 작용의 내적 조절에 부합된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카르마요가의 봉사의 의미가 라자요가에서는 마음의 생각마저 완전일체 헌신의 의미로 내포되어 있으며, 명상의 합일이 체험 속에서 지고상태에 이르는 평정의 요가 또한 포함되어 있다. 아마 이런 연유로 라자요가는 모든 요가를 아우르는 왕적인 요가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잠깐 라자요가의 경험과정을 정리해 보겠다.
먼저, 영혼에 의한 자각을 되뇌이며, 내 자신이 영혼이란 의식을 지닌 채 영적의 미묘상태로 들어간다. 혼에의 집중이 잘 된 상태를 경험하면 차츰 내 생각, 지상의 것을 모두 잊고 지고의식의 존재에 귀를 귀울이게 된다. 내 생각이 점점 소멸하여 지고의식체를 그의 본체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지점에 이르면, 그의 모든 자질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것과 동시에 나의 변모를 경험하게 된다. 나아가서, 이 큰 지고의식의 모든 질량이 나를 통해 우주에 번지며, 더 이상 자아의식마저 없어지면 완전한 깨달음, 완전합일에 의한 씨앗단계(seed stage)가 일어난다.
라자요가에서는 씨앗단계에 이르는 주요 세 요소로 사랑, 헌신, 지식을 꼽는다. 인간의식에서 가장 귀한 인격이 있다면 그것은 흠모와 숭앙, 즉 사랑의 힘이며, 이것은 생명체와 생명체, 인격과 인격, 인간혼과 지고 의식과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결과, 자연히 뒤따르는 것이 자아의 완벽한 헌신이다. 다시 말해, 정확한 영혼의식으로 이뤄지는 완전 겸허는 다른 뜻으로 완전 헌신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신앙생활을 육체의식 차원에서 행하려고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힘들며, 그 결과마저 얼마나 부족했던가를 깨닫게 된다.
기존의 모든 훌륭한 경전들의 지식에도 불구하고, 큰 의식상태의 체험이 수행자들 사이에서만 매우 제한적으로 이뤄질 뿐 일반적이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런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지식의 부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라자요가에서는 누구나 간단, 명쾌하게 명상에 필요한 요점을 습득한 뒤 어느 정도의 훈습을 쌓아 의식과 마음 상태가 맑아지면 나름대로 합일의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지식은 라자요가 전 강좌를 포함, 매일 아침의 Murli(신의 지식)공부가 다 이용될 수 있으며, 학생들은 더욱 쉬운 명상의 발전을 위해 매일 매일 이 영적 지식들을 음미해 봄으로써 지각을 보다 순수하고 영적인 차원에 둘 수 있다.
요가, 즉 명상은 다른 말로 지고의 존재에 대한 기억이다. 이는 여러 종교에서 기도, 명상, 참선 등을 위해서 깊은 차원의 명상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과 같다. 요컨대, 요가란 신의 개념이든 지고 의식의 존재이든, 우주에서 가장 좋은 것에 대한 기억인 만큼 명상 그 자체는 가장 최상의 상태를 선택해서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능동적이고도 손쉬운 마음가짐(정신, 영혼),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의 구약성서에 해당하는 인류 최고의 경전이라는 인도의 ‘바가바드 기타’의 에센스인 「만마나바브」, 즉 너를 나(신)에게 집중하라는 만트라가 있는데, 라자요가에서는 이를 우리의 명상생활에 실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해 놓고 있다.
제2강좌는 여기서 그치고, 명상 테이프 제2일 ‘님에의 여정’을 듣거나 약 5분간 강좌내용을 음미하면서 명상시간을 가져 보도록 하자.
<명상 연습>
나는 내 자아를 하나의 영혼으로 자각하게 되었다.
내 이마 앞 중앙에서 빛나는 한 점의 빛, 빛의 원천.
나의 생각은 몸 저 밖으로 향한다.
이 육체적인 세계 위로 이동해 간다.
저 머나먼 거대한 빛의 세계로 옮겨간다.
거기는 완전한 평화와 정적의 세계이며,
그곳은 나의 고향이다.
나는 지고의 존재 앞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 존재는 빛의 스파크이다.
빛의 대양을 밝게 비춘다.
나는 그 빛을 내 안에 흡수한다.
오! 바바, 평화의 대양.
나는 그 평화의 파동을 느끼고 있다.
부드럽고 시원하고 조용해지는 나의 영혼.
내 본래의 상태는 그처럼 평화스럽다.
그리고, 이것이 나 자신이었고,
또 내가 영원히 그렇게 되어질 상태이기도 하다.
이 전지전능한 원인은 나 자신을 그의 힘으로 가득 채우시며,
나의 나약한 영혼을 완전히 변모시켰다.
나는 힘과 능력의 화신으로 되어 버린다.
평화의 빛, 힘과 순수, 환희의 화신이 된다.
3. 제 3강좌 : 행동의 법칙, 카르마
이 강좌는 카르마(Karma)의 법칙에 대해서이다.
하나의 운동감이 있으면 거기 정확한 힘이 대항한다는 뉴턴의 운동법칙처럼 인간영혼도 그와 똑같이 하나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행동의 법칙이다. 즉,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꼭 같은 혹은 정반대의 행동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첫째 강의에서도 지적했듯이, 우리 의식의 세 작용 가운데 무의식에 해당하는 과거의 업적이나 행적에 대한 인상기록(잠재의식)을 근거로 현재와 미래의 모든 상황이 정확하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카르마, 즉 산스카라(Sanskra)는 그런 점에서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 인과응보, 씨앗과 열매로 말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순간 순간이 필연이며, 회피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마치 컴퓨터와 같이 정확하게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내장된 과거라는 저장고의 결산량이 표출된 것이다.
이런 인식은 모든 고전이나 종교 사상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인과응보설」, 「뿌린 대로 거두리라」, 「한 쪽 뺨마저 내어주라」 등은 업의 중화설을 그대로 담은 말들이다. 이런 원리를 살펴서 이해하다 보면, 자칫 우리의 미래가 이미 과거에 의해 예정됐다는 이른바 체념론에 빠지기 쉬우나, 이것은 카르마의 법칙을 반밖에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나 상황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하나의 씨앗에서 풍성한 열매가 열리듯이 하나의 매우 작은 행동이 수 년 혹은 일생을 거듭해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런 현상을 추리하려다 보면 더욱더 혼미에 빠지기 십상이며, 또한 아무리 하찮은 행동일지라도 단지 하나의 양상을 보고 그 카르마의 깊이를 이해할 수는 없다.
이런 카르마의 굴레에 얽혀 있음을 자각할 때 우리는 부정적 카르마를 더 이상 막을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선업(선업)의 원인, 행운의 결실을 가져올 카르마를 쌓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카르마에는 선업, 악업, 중도업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선업은 말 그대로 순수한 업적이며 행복을 주는 행동이다. 반대로, 악업은 악덕에 근거한 행동이며 슬픔을 주는 행동이다. 중도업은 긍정과 부정, 그 어느 효과도 아닌 행동으로 우리 생활의 여러 가지 양상 속에 나타나 있다.
라자요가에서 카르마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카르마의 지식을 갖고 지고의 의식상태에 연결될 수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고양되는 우리의 의식상태 속에서 더 이상 죄업이 없게 되고, 그러면 카르마 잔고의 증가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명상 차원의 깊은 내면의 기도 상태를 정화의 불이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 수많은 삶의 부채를 감소, 소각시킬 수 있다. 즉, 명상 중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마음작용의 모든 잡념이 결국 무의식이라는 저장고에서 떠오르는 거울과 같아서 그것을 재정리하고 정화하는 것이 요가명상의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통해 삶의 부채와 잔고를 없앨 수 있다. 이런 명상 수행으로 얻은 순수한 힘과 영감은 헌신과 반작용(저항)포기 등을 가능케 하며 순수 카르마를 창조하여 미래에서 건강, 행복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지식은, 부정한 업이란 육체의식(Body Consciousness)의 결과로서 이 물질의식은 우리 의식에 제한을 두는, 예컨대, 몸, 남녀, 노소, 국가, 문화, 인종 등등 외적 요소와 그 분열의식에 의해서 행동이 영향 받게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다. 이것을 모르고 있을 때 정업이 안 되며, 그 결과 육체의식으로 인해 남에게 슬픔을 주고 반대로 내 자신 또한 슬픔을 경험하는 등 더욱더 불행의 깊은 덫에 걸린다고 라자요가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와 달리, 자아에 대한 지고 의식에서 행동하면 나와 남 모두에게 행복을 주고 그야말로 선업을 쌓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자신의 단계에 따라 의식상태가 변화하기 때문에, 영구적인 것은 역시 그 환희의 원천이 닿아 있는 지고 의식(Supreme Consciousness), 신 의식(God Consciousness)에 이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행복을 완벽하게 가져다 준다. 더 나아가, 가장 지고한 업의 형태는 나만의 행복감을 만끽하기보다는 다른 영혼을 지고의 상태나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업에 대한 관념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식이 육체의식에 매몰된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비록 중도업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부정업에서 못 벗어난다. 내 자신이 부정한 의식상태에 젖어 있는 한, 엄밀히 보면 일체가 죄업이며 부정적인 상태이다. 따라서, 자선행위조차 과연 선업이 될지 또는 그 반대일지 모르는 것이므로, 무한한 자선행위라면 타인을 진정한 신의식, 최고의 지고의식 상태로 가까이 데려감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자각을 통해 선업을 쌓을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크게 네 가지, ▲생존행위, ▲책임에 의한 가족 업무, ▲오락 및 휴식, 여가 등의 생활, ▲봉사 활동으로 구분된다. 이 네 가지 생활 역시 카르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먼저, 제 아무리 생존을 위한 중도행위이더라도 의식이 인간의 오악(정욕, 분노, 이기심, 질투, 탐욕)에 처해 있다면 그것이 무슨 선업에 속할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고의식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 몸을 정성껏 다스린다는 그런 높은 차원에서 행하는 일상적인 생존 행위만이 선업을 쌓는 원인이다. 가족에 대한 의무, 노동의무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이런 의무들이 결국 창조주에게서 부여된 것임을 자각할 때, 그를 위해서 준비하고 드리며 또 취하는 마음 자세와 활동은 우리가 대하는 모든 물건이나 분위기에 사랑과 순수, 헌신의 바이브레이션을 깃들게 하고, 그로써 모든 책임, 업무조차도 순수 카르마를 고양시킬 수 있다.
여가활동, 즉 요기들이 수행함에 있어 갖는 만족이나 오락이란 영혼의 지고의 만족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오직 환희의 근원체인 지고 의식체와 가까이 할 때만 가능한 것으로, 이런 체험을 겪고 나면 지금까지의 오락이 단지 외적 기쁨을 추구하는, 또 자신에게만 국한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의식의 방향에서 이뤄지는 수련이나 여가활동은 그 자체로서 순수 카르마가 될 수 있으며, 아울러 남에게도 초감각적 기쁨을 줄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봉사와 여가는 불가분하게 하나의 행동이 된다. 남에게 고기를 자선하기보다 고기 낚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듯이, 진정한 봉사는 그 사람에게 지고 의식을 갖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좋은 염원과 사고, 좋은 말과 행동, 최고의 지식, 그리고 고양된 순수행동을 통해서 거의 24시간 동안 순수업의 행위를 할 수 있다. 이런 수행이 나의 모든 생활을 지배할 때 영혼은 그 영감을 통해 작용하므로 낮의 활동뿐만 아니라 꿈을 통해서조차 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될 때, 선한 카르마를 통해서 내 개인의 산스카라, 기질, 성향이 바뀔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운명마저 바뀌게 된다.
여기서 요가의 불, 정업의 불, 즉 명상과 카르마의 관계를 살펴 볼 때, 깊은 명상에서 체험되는 지고의식과의 연결 상태는 마치 불과 같은 결합으로 말할 수 있다.
만일 카르마의 행위가 한 사람 대 한 사람이라는 상호간의 단순성이 아니라 지고의 영혼에 대한 사랑과 힘으로 가득 찬다면, 그 결과는 수 천 배의 결실을 맺어 정확하게 되돌아 와서 내 자신을 포함하여 주위에까지 영향을 준다.
우리가 막연히 부정적 개념으로 알아 왔던 업에 대해서 이처럼 다양하게 살펴보고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껏 막연히 추측을 통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인생의 여러 문제들, 의문점들이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일각일각조차 과거의 과거, 우리가 모르고 있는 시간 속의 원인에 근거하여 무의식적 정신세계의 과학적 법칙 아래 엮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정확히 이해할 때 우리의 삶을 더욱 효과적으로 살 수 있고 더 이상 악업에 빠지지 않을 초연한 자세에 자신을 둘 수 있게 된다.
그런가 하면, 미래를 위한 선업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카르마에 대한 이해는 수행과정상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지식이다. 삶은 결코 우연히 일회적으로 생겨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진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점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아울러 일체를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열린 마음과 관용, 나아가 우주의 비밀을 통찰하게 되는 예지의 문을 열 수 있다. 즉, 어떤 힘든 업조차도 그것이 결국 우리의 무의식에서 소멸, 정화되기 위해서 일어나는 일이며, 작용에 대한 반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면, 아름다움을 넘어서 우주 대진리의 정화감에 부딪쳐서 되울리는 은총에 감격하게 된다.
오히려, 현재를 일회적인 것으로 이해하려 할 때 우주는 점차 모순투성이의 혼돈과 무질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원한과 분노, 슬픔 등 악업으로 오는 자기중독증의 악순환에 빠져 모순의 늪에서 헤맬 수밖에 없게 된다.
업은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 우리 영혼의 바탕 내지 지금의 인생사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추리해 볼 수 있을 때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정신 수행과 더불어 느낌과 체험으로 이해되어야 비로소 확신이 서게 된다.
이렇듯, 카르마는 우주 만물의 인간사에 대한 통찰력을 지니게 함으로써 라자요가 수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식이다.
요가 수행법이 중요한 까닭은 깊은 기도나 명상을 통해서 과거업을 정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모든 업은 결국 고통으로 우리에게 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래의 선업조차 기대하기 힘들게 된다.
이런 카르마의 비밀을 옳게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과연 카르마 그 자체의 덫에 걸려있는 인간의 지식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원천적이며 신성한 곳에서 오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신성한 원천에서 나오는 것이란 믿음 아래 우리를 그 존재와 합일시킬 수 있다면 그 자체로서 우리는 완전함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라자요가의 수행법은 명상 자체를 위한 명상이 아니고, 명상 그 자체가 정업,선업 구현의 적극적 과정임을 알게 된다.
이것으로 제3강좌를 끝내고, 잠깐 명상을 한 후 다음 강좌로 넘어 가도록 하자.
나의 생각, 나의 의식은 한 점으로 모인다.
나는 하나의 영혼, 빛나는 광채.
이 몸에 앉아서 행동이라는 의복을 통해서,
나는 행복을 위한 행위를 한다.
세상의 일들은 떠나가 버리고, 나는 빛의 세계로 날아간다.
가장 높은 내 고향인 그 곳으로....
영혼으로서의 내 안에는 산스카라가 있다.
성향, 잠자는 기질들, 이것은 내 과거 카르마의 기록들이다.
나는 또한 내가 부정적이며 또 긍정적인 산스카라를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부정적이며 긍정적인 카르마의 저장고,
나는 그 곳에서 나의 아버지를 만난다.
대양, 빛나는 별, 자비로운 나의 친구.
나는 정화됨을 느끼며, 그의 빛 속에 가라 앉는다.
그 신성한 자질 속에서, 그의 지고의 사랑 속에서 무한한 환희,
영원한 평화감, 말할 수 없는 기쁨.
그 속에서 나의 낡고 부정적인 힘들은 다 사라져 버린다.
내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손길이 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 피로한 영혼을 어루만져 주신다.
그리고, 서서히 내 본래의 진정한 사랑과 평화,
환희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신다.
나는 만족으로 가득 채워진다.
나는 지금 이 행동의 세계로 다시 돌아 왔다.
나는 충만하며 진리의 힘으로 넘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오직 진실되며 순수한,
그래서, 나의 형제들을 고양시키는 그런 행동 들만을 할 수 있다.
4. 제 4강좌 : 시간의 원리
시간의 의미
첫째 내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나는 시간의 주인도 될 수 있고 노예도 될 수 있다. 뉴턴식의 견해에서는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재촉하게 되므로 시간의 노예가 된다. 아인슈타인식의 시간은 변화하는 것과 대비한 상대적인 속도에 의존한다. 그러면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결정하는, 변화하는 것을 나 자신 안에서 찾아 본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나의 생각이다. 생각을 늦추면 시간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의 속도를 빨리 하면 시간은 줄어든다.
생각 사이에 혹은 말과 말 사이에 공간을 남겨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생각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공간도 인식하게 된다. 생각들 사이에 이런 평화로운 공간이 있음을 깨닫게 되면, 바로 현재에 집중하게 되며 여유로운 시간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생각의 속도 자체가 아니라 행동의 속도에 비교되는 나의 생각의 속도인 것이다. 만약 생각(나 자신에게 내린 나의 지시 사항)의 속도가 내가 행동하는 속도와 일치한다면, 스트레스나 긴장이 없고 일을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로 인해 나 스스로가 시간을 '창조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렇게 할 때 또 하나의 유익한 점은 행동이나 반응을 통제하기 쉽다는 것이다. 행동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한 지시 사항을 몸에 주기 때문에, 언제나 힘들이지 않고 완전히 통제된 행동이 된다. 또한 생각을 늦추면서 남겨 두는 공간으로 인해 우리는 쉽고 즉각적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생각과 생각 사이에 있는 공간은 우리가 일시적으로 정지 상태에 있는 시간과 같다. 정지 상태에서는 부드럽고 쉽게 어느 누구에게도 불편함을 끼치지 않고 마음먹은 방향으로 움직여 갈 수 있다. 시간의 여유...
생각의 속도를 늦춰서 우리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을 허용하는 연습을 하면 여러 면으로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영혼의식에 훨씬 쉽게 잠겨들 수 있다. 생각 사이의 공간으로 인해 영혼의 본성인 평화와 만족이라는 달콤한 느낌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된다. 물론 뉴턴의 시간은 우리 주위의 물질 세계를 지배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고정된 틀이 없다면 세상은 매우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관점'에서 시간을 이해하면 물질 세계를 떠나 시간이 없는 공간인 영혼 세계로 날아갈 수 있다. 이 지고의 영역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고 불변의 고요함만 있으므로 시간이란 없다. 나의 영적인 고향에서는 생각이 정지될 정도로까지 속도를 늦추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 완전한 고요와 정적과 만족 속에서 나는 영원함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명상음미 요점>
시간의 정확한 이해는 반복될 한 순간의 의미와 함께 새로운 물질 순환 역사의식이 자각된다. 오염과 재생의 순환에서 오직 심신의 순수행이 완전미래를 얻는 비결임을 알게 된다. 지금의 세계오염을 볼 줄 알며 순수 명상행의 실질적 필요성을 자각한다.
<명상 연습>
‘과거는 과거다’라고 말하는 습관을 연습한다. 앞을 향하도록 한다. 어떤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더라도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단지 그것을 정복하겠다는 결연한 생각을 가진다. 그대로 놔두면 대개 죄의식이나 후회로 흘러가 버릴 에너지를, 긍정적 생각이나 의지력으로 흘러 가도록 방향을 조정한다. 그리하여 영혼이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한다. '그래, 나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개선하느라 노력하고 있어'.
제 5 강좌
여기서 잠깐 강의를 요약해 보자.
우선, 라자요가에 있어서 이해의 주요 관점인 창조의 미스테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라자요가에서는 싸이클과 시간 변화의 개념을 역사에 비춰봄으로써 인간혼이 어떻게 카르마의 법칙에 의해 신성 차원에서 인성으로 다시 동물성으로까지 낮아졌으며, 그것이 다시 신성에 의해 높여지는 가를 알려 주고 있다. 이런 변화를 인식할 때 종래의 창조 개념보다는 오히려 재창조의 의미가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 물질, 지고의식(신성) 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라자요가에서는 소멸과 재창조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며 동시에 일어난다고 본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창조주의 이중행위(Double Act)라고 한다. 다시 말해, 창조는 물질적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신성의 개입으로 인간혼이 변화되고, 그로 말미암아 영적인 자각과 인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해서 변화된 인간 영혼(의식)은 그리도 강렬한 순수 파동을 지니고 있어 자동적으로 물리적 변화와 자연적인 흐름마저 유도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창조를 존재의 소멸이라기보다는 모든 부정적 개념의 소멸로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예를 들면 우주의 음양변화와 같은)
이런 정신의 재창조, 영적 개조는 완전의식에 달려 있기에 교육을 필요로 한다. 영적 개조의 지식에 의해 영혼은 신성하게 되며, 따라서 인간은 육체적 한계를 넘어 모든 악에 찬 낡은 인격을 버리고 순수와 신성이 깃든 새 행동을 창조하게 된다. 비록 철의 오염시대에 살지만 삶 자체가 다이아몬드와 같아지며, 과거 업의 굴레를 청산하고 황금시대에 필요한 새 자질을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창조주로서 신의 역할은 교사로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그루의 튼튼한 나무를 바란다면 파종을 잘 해야 하듯 우주라는 나무의 씨앗인 창조주를 이해 하는 것 역시 내가 선택한 행동의 씨앗을 잘 뿌려야만 가능하다. 요컨대, 파종의 제 때를 놓치면 나중에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열매 따기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이야말로 자아와 지고의식에의 인식을 위해 영적 수련과 수행에 부지런해야 한다. 교육은 나무를 심는 것과 같아서, 식목의 시기는 의외로 짧으나 그 열매와 보상의 시기는 길다. 라자요가의 공부는 매우 간단하나 그 결과는 수 천 억겁을 통해 동일하게 지속, 반복된다(주기의 원리 - 이 과제는 수행을 겸한 고급코스에서 아주 자세히, 그리고 명쾌하게 다루어지고 있음).
지금 합류의 시대에 중요성과 의무에 대해 자각이 있다면, 명상(요가 : 지고 의식에의 부단한 기억의 상태), 그리고 이에 대한 지식 습득으로 영혼을 지고의 상태로 상승, 승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곧 황금시대에 들어갈 수 있는 기초공사이기도 하다. 카르마의 법칙은 이미 우리에게 일체의 시공(우주역사)은 행동(업적, 수행)으로 밖에 결과되지 못한다는 것을 엄연히 가르친다. 이 시대는 모든 주기 가운데서 그 어떤 시대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지식을 경험할 수 있기에,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황금시대의 순수하고 고양된 업(수행)을 창출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모든 욕망을 정복하여 잠들게 할 때 자연적으로 완전 만족과 평화감이 뒤따를 것이다.
나무의 회생자는 창조자이며 오직 씨앗일 뿐이다. 나무의 가지와 잎새에 해당하는 모든 가르침이나 학문들이 제 아무리 뛰어난다 해도 그들의 힘과 보조만으로는 황금시대를 만들지 못한다. 우리가 낙원을 꿈꾼다면 우리의 주위를 가지에서 전체로, 즉 씨앗으로 돌려야 한다. 종교, 철학의 부분적인 개념이나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는 지고의 혼에 이르는 전체적인 지식을 얻을 수 없다. 나무의 한 쪽은 아버지에 관한 지식을 주지만 삶과 재생, 업에 대한 통찰은 못 주며, 다른 쪽은 그 반대로 아버지에의 사랑을 불어 넣지 못하고 있다.
각 영혼의 생각과 의미는 다르지만 한 씨앗에서 나온 같은 나무이기 때문에, 한 가족으로서 만족감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서로 기능적으로 의지하기보다는 뿌리가 나오는 씨앗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끝.
보조자료 실천적인 명상법 / 더 높은 의식을 향하여
안국동 정신세계원에서 구입가능.(02-747-7033)
***BK 라자요가 코스는 주 1회 1시간씩 - 7회로, 기초7, 중급7, 고급7의 단계가 있습니다.
***전 과정이 무료입니다. 02-514-8962
라자 요가 명상을 통해 얻는 여덟 가지 힘
생각을 안으로 거두어 들이는 힘 위험에 처함 거북이 처럼 부정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거두어들여 평정을 유지하고 자신을 보호한다 협력할 줄 아는 힘 남을 위해 내 시간과 경험과 지혜를 내줄 줄 아는 능력을 개발한다. 직면하는 힘 강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내적, 외적인 장애, 시험, 도전에 맞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한다. 판단력 정확한 저울처럼 나 자신과 남의 선택, 결정, 행동의 질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 |
소모적인 생각을 묶어 버리는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모든 낭비적인 생각을 버리는 기술을 배워 항상 긍정적인 마음 상태를 유지한다. 관용의 힘 나무와 같이 내적, 외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개발하여 상황에 긍정적으로 대응한다. 분별력 명상을 통해 일초만에 옳은 것과 그른 것, 진실된 것과 가식을 구별할 줄 아는 마음의 명료성을 키운다. 수용(적응)력 바다와 같이 남들의 존재, 아이디어, 욕구를 수용하도록 자신을 고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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